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림 압둘자바 (문단 편집) == 선수 경력 == [[뉴욕시|뉴욕]] 출신으로 1947년에 태어났으며 [[농구]] 이전에는 [[야구]] 외에 [[수영]]과 [[축구]]도 했었다. 14세 때인 1961년부터 파워 메모리얼 아카데미(1984년 폐교.) 시절 잭 도나휴(1931~2003) 감독[* 그는 1972년부터 16년간 캐나다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어 [[1976 몬트리올 올림픽]] 및 [[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]]에서 두 차례 4등을 차지했고, 2013년 국제농구협회(FIBA) 명예의 전당까지 헌액됐다.]에게 농구수업을 받았다. 고교 시절 71연승을 기록하는 등 고교 시절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여왔고, 1966년에 농구명문 [[캘리포니아 대학교/로스앤젤레스 캠퍼스|UCLA]]에 입학하여 존 우든(1910~2010) 감독의 가르침을 받아 3년 동안 전부 [[NCAA]] 토너먼트에서 우승하면서 싹수부터 시퍼랬다. 이 시절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루머는 입학 직후 1학년과 상급생으로 나눠져서 연습경기를 했는데 압둘자바가 주축이 된 1학년팀이 상급생팀을 압도적으로 이겼다는 것. 문제는 그 상급생들이 그 직전해 NCAA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한 주전 멤버들이었다는 것이다. [[슬램덩크(만화)|슬램덩크]]의 인기로 인해 꽤 유명한 사실이다[* 이외에도 [[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]]의 스몰 포워드였던 [[릭 배리]]의 특이한 자유투폼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알려졌었다.]. 압둘자바(당시 루 앨신더)는 1965년에 입학해 1학년 시즌이 1965-66 시즌이었는데 [* 미국 학교는 가을에 개학해 이듬해 봄에 종강한다.]그가 입학하던 전 시즌인 1964-65 시즌에 UCLA는 토너먼트 우승을 거뒀다(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1965_NCAA_University_Division_Basketball_Tournament|65년 토너먼트 결과]]). 이를 두고 압둘자바는 "그들(상급생 팀)은 1965-66 시즌을 시작하며 전국에선 넘버 원이었지만 캠퍼스에선 넘버 투였죠"라고 [[http://www.espn.com/mens-college-basketball/story/_/id/7831845/freshman-life-changed-elite-basketball-players|언급했다]]. 다만 이 때 압둘자바에게 패배한 팀은 전 시즌 우승팀이었지만 게일 굿리치라는 에이스를 비롯하여 그해 졸업한 선배들의 전력 누출 때문인지 전혀 강하지 않았다. 1966년 NCAA 토너먼트 결과를 보면 UCLA는 우승은 커녕 토너먼트 진출도 못했다.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1966_NCAA_University_Division_Basketball_Tournament|1966년 토너먼트 결과]]. 상세한 성적을 보면 이 당시 UCLA팀은 18승 8패라는 평범한 성적을 거뒀다.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1965%E2%80%9366_UCLA_Bruins_men%27s_basketball_team|1965-66 시즌 UCLA 로스터]]. 물론 압둘자바가 대단한 건 변함이 없지만, 그가 이긴 팀이 전 시즌에 우승을 거둔 팀임에도 실제 전력은 그리 강하진 않았기 때문에 좀 애매한 케이스이다. 여담이지만 1966년에 우승한 팀은 텍사스 웨스턴(Texas Western)이란 학교로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에 역대 최초로 주전선수 전원이 흑인인 팀으로 NCAA 토너먼트 우승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고 이 팀을 이끈 감독 돈 해스킨스와 선수들의 일화가 영화로 나온게 Glory Road란 작품이다. [[http://star.ohmynews.com/NWS_Web/OhmyStar/at_pg_m.aspx?CNTN_CD=A0002259477|영화 소개]]. [[제리 브룩하이머]]가 제작했다. 현재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는 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캠퍼스로 교명을 바꾸어 지금도 존재한다. 아무튼 1학년을 마치고 NCAA 토너먼트에 데뷔한 압둘자바의 대학생활은 딱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. '''역대 최고의 NCAA 선수'''.[* 그에 비견될 만한 선수는 압둘자바와 마찬가지로 3년 연속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고 2년 연속으로 무패 우승한 그의 대학 후배 [[빌 월튼]] 정도 뿐이다. 압둘자바와 월튼이 재학하는 동안 UCLA는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는데,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서 후술되는 7연속 우승을 포함해 무려 9번이나 우승하기도 했다.] 이 시기 UCLA가 NCAA 토너먼트를 7연패하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와중에 1967년에서 1969년까지가 압둘자바의 시대였다. 얼마나 사기 유닛이었냐면, 압둘자바가 2학년 시즌을 마치자마자, '''NCAA에서 덩크 금지 룰을 만들 정도'''. 그리고 덩크가 금지당한 이 괴수께서는 손수 '''스카이 훅'''을 개발한다. 엄밀히 말하자면 압둘자바가 스카이 훅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. 이미 NBA 초창기에 [[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]]의 전신인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의 [[조지 마이칸]]이 리그를 지배할 때, 그가 즐겨 쓰던 슛이 현대에 부르는 훅 슛이다. 압둘자바도 이를 참고했고, 특유의 길죽길죽한 비주얼과 높은 타점으로 독특한 폼을 선보였던 것이다. 훅 슛은 기본적으로 빅맨이 팔을 '''위로''' 쭉 뻗은 상태에서 쏘는 것이라 일반 슛보다 타점이 훨씬 높고 쏘는 속도도 빠르며 블록하기가 훨씬 힘들지만 한손으로 쏘는 것이기 때문에 골대에서 멀어지면 정확도가 현격하게 떨어진다. 하지만 압둘자바의 스카이 훅은 기존의 훅 슛과 다르게 팔을 아예 '''골대 반대 방향으로''' (물론 수평으로 뻗는 게 아니라 ↗요 정도 각도로 위쪽으로) 뻗은 상태에서 압둘자바 특유의 높이와 점프력을 이용해 올라가서 쏘는 것이기 때문에 안 그래도 타점이 높은데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더 올라가서 앞에서 막는게 거의 불가능하다. 게다가 비교적 타점이 낮은 뒤쪽에서 막는다고 해도 기본 높이가 너무 높고 빨리 올라가기 때문에 블록하기 불가능한 건 마찬가지. 이토록 특이한 슛이라 기존의 훅 슛과 구분해서 '스카이 훅'이라고 부르는 것. 슛 장면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훅 슛은 툭 던지는 느낌이라 포물선을 그리 높이 그리지 않지만, 스카이 훅은 길고도 높은 포물선을 그린다. 물론 이렇게 하면 난이도는 극악으로 올라간다. 훅 슛이 공을 올려놓는 느낌이라면 스카이 훅은 거의 반대쪽에서 투척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. 그러나 압둘자바는 극강의 손끝감각으로 이런 어려운 슛을 높은 확률로 넣을 수 있어 주무기로 써댈 수 있었던 것. 다른 빅맨들도 스카이 훅이 위력적인 건 알지만 '''알아도 어려워서 못 쓴다.''' 보통 선수들 같으면 터프샷이라 피해야 하는 페이더웨이를 주무기로 썼던 [[마이클 조던]]과 같은 케이스다. 정리하자면 훅 슛은 그 이전에도 있었지만, 그처럼 훅 슛을 던지는 것은 NBA 역사상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. NCAA는 단기간 리그파괴를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NBA의 빅맨들에겐 20년의 재앙을 선물해줬다. 졸업과 동시에 1969 드래프트에 참가, 전체 1번 지명으로 창단된 지 2년 된 [[밀워키 벅스]]에 지명 됐다. 그러고는 '''당연히''' 신인왕 획득. 이 때 NBA의 라이벌 리그인 [[아메리칸 농구 협회|ABA]]에서도 압둘자바를 꼬시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, 바로 원하는 팀에서 데뷔하게 해준다는 것이다. 드래프트 당시부터 엄청난 대우를 받았던 것. 입단 2년차에 일찌감치 팀을 '''우승'''으로 이끌었다. 밀워키 벅스 역사의 첫 번째 우승이 이 시기였다. 이 때의 밀워키 벅스는 고작 창단 3년차로, 창단 후 가장 빨리 우승한 구단이 되었고, 이는 여지껏 깨지지 않고 있다. 커리어가 굉장히 길어지고,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의 모습이 많이 방송되어서 기억엔 많이 남아있지만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을 보냈던 선수이다. [[빌 러셀]]에 치이고, [[윌트 체임벌린]]에 치이는 등 우승에 한끝 모자랐던 은퇴를 앞둔 [[오스카 로버트슨]]을 도와 우승을 이뤄냈다. 하지만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인 뉴욕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낸 압둘자바에게 미국 중부지역의 소도시 밀워키는 그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. 그래서 우승한 후 팀에게 끊임없이 우승도 시키고 해줄만큼 해줬으니 고향팀으로 트레이드를 시켜달라고 요구한다. 팀도 더 이상 잡지 못할 것을 아니까 긍정적으로 검토했다. 그나마 원래는 고향 [[뉴욕 닉스|뉴욕]]이나 [[브루클린 네츠|뉴저지]]로 가고 싶어했는데 트레이드 카드가 안맞아서 밀워키 벅스 프런트는 압둘자바에게 양해를 구하고 대안으로 [[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|로스앤젤레스]]로 트레이드 시킨다.[* 사람들은 이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후배 센터인 [[샤킬 오닐]]과 비교한다. 둘 다 다른 팀에서 시작했고,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본인이 싫어서 먼저 트레이드를 요구했고, 결국 로스앤젤레스로 오는 과정이 닮아있다.] 그 이후 밀워키 벅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. 그래도 압둘자바는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동안 매시즌 매경기 40분 이상 뛰면서 20-10을 밥먹듯했고, 창단 첫 파이널 우승과 1973-74 시즌 파이널 준우승 등 신생팀 밀워키 벅스의 리그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. 거기다 트레이드 되지 않았다면 자유계약으로 나갈 것이 확실했다. 다름아닌, 밀워키 벅스의 우승을 함께 이끈 [[오스카 로버트슨]]이 1970년 [[존 하블리첵]] 등과 함께 NBA를 연방법원에 제소하여 1976년 FA 제도의 초석이 되는 선수의 자유이적을 보장하는 판결을 이끌어냈기 때문에, 압둘자바가 1975년 이후 팀에 남았더라도 근 시일 내에 이루어졌을 FA 제도의 수혜자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. 이 때문에 밀워키 벅스도 미련 없이 압둘자바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. 실제로 NBA에서 자유계약제도가 생긴 것은 1976-77 시즌 종료 후로, 최초의 자유이적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가드 캐지 러셀이 되었다. 러셀은 [[시카고 불스]]로 1년 계약을 맺고 자유이적했다. 그러고는 1975년 이적 후에는 핵심선수로 뛰다가 1980년 [[매직 존슨]]과 [[제임스 워디]]가 온 후에는 그들에게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골밑 수비에 전념하는 런앤건의 골키퍼가 되어 41세[* 참고로 압둘자바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이적한 첫해, 훗날 1981-82 시즌부터 레이커스의 감독을 지낸 전설적인 헤드코치 [[팻 라일리]]는 선수로 뛰고 있었다.]까지 선수로 활약하며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축으로 활약했다. 나이들어서 매직 존슨에게 팀 리더 역할을 물려주기 전까지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1옵션이었다. 물론 매직이 팀의 리더가 된 후에도 속공상황이 아닌 하프코트 오펜스 상황에서의 압둘자바는 안정감 그 자체라 '''38세까지''' 평득 20점에 야투율 50% 후반대를 찍었다. 그만큼 늙어도 괴수였단 이야기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